콜로라도 뉴라이프 선교 교회 | 집회 단상 #2-인생은 해석이다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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집회 단상 #2-인생은 해석이다

집회 단상 #2-인생은 해석이다

지난 29일 분량의 잠언을 읽다가 만난 구절이다. “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바르게 행하는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.” [잠언 29:27] 그런데, 이 구절의 영어 번역이 흥미롭다. “An unjust man is an abomination to the righteous, but one whose way is straight is an abomination to the wicked.”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볼 단어는 “abomination – 혐오스러움, 가증스러움”이란 단어이다. 이 구절을 구어체적으로 번역을 하면 “불의한 자는 의로운자에게 혐오의 대상이지만, [같은 맥락에서] 옳은 길을 걷는 자는 그렇지 않은 불의한 자들에게 혐오의 대상이다”라고 번역할 수 있다. “혐오스럽다”는 단어는 대부분 스스로 옳게 여기는 자들이 그렇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는 행위이다. 그런데 잠언은 불의한 자들도 의로운 자들처럼 [의로운 자들을] 혐오한다는 것이다. 왜 그럴까? 불의한 자들은 적어도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하여 자기 스스로는 옳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. 그래서 한국말 속담에 “팔은 안으로 굽고,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”고 한다. 그렇다, 인간의 주관성의 문제이다. 그래서 인간은 기준이 필요하다. 그럼 인간에게 절대적인 기준이 무엇일까?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, 이세상을 밖에서 안으로 볼 수 있으신, 이 우주의 질서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다. 이 하나님,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된다. 왜 인생의 기준이 중요할까? 집회 첫 날, 이찬수 목사님께서 구약의 선지자 “요나”를 다루시며 소개한 “인생은 해석이다”는 말을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 것이다. 자, 온전한 해석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점이 무엇인가? 그렇다, 기준이다. 요나에게 니느웨보다 다시스가 훨씬 더 안전하고, 스스로 생각하기에 좋은 대안이지만,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. 요나의 가장 큰 실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해석하며 행동할 때,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는 것이다. 그리고 생각한다. 나는 어떨까? 이제 가을이 코 앞이다. 추수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. 어쩌면, 나는 올해도, “아, 날씨가 좋지 않았어, 상황이 불가항력적이었어”라는 수식어를 등장시키며, 내 인생의 열매 없음을 정당화하려 할 것이다. 그 때, 스스로에게 다짐해야겠다. “과연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내가 살아온 인생의 한 해를 어떻게 보실까?” 다시 한 번,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아 내 인생을 해석하고 행동해야겠다. “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.” [마 25:23]  – 정대성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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